-제주에서도 공식적인 최초의 교회가 세워지기 전, 제주시 애월읍 금성리에서 자생적인 기도모임이 있었다.
1907년 3월 둘째주에 생긴 자생적 교회라 볼 수 있다.
최초의 기도모임은 이미 서울에서 교인이 된 조봉호와 이도종, 양석봉씨가 함께 금성리 하동 양석봉씨 집에서 예배드린다.
최초의 기도 모임이 모태가 되어 세워진 금성교회는 새로운 예배당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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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금성교회 모습을 양석봉씨 막내 아들이 증언한다. 그 당시 신상생활 하기가 쉽지 않아고 무속 풍속이 심했다.
당시에는 예수 믿는다는것이 서양종교로 인식돼 있어 믿는게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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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최초의 성내 교회와 금성리에서 시작된 자생적 기도모임 등 선교의 불길은 차츰 남쪽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주로 해안가와 북쪽과 남쪽을 잇는 도로를 중심으로 교회들이 들어섰다.
이기풍 목사님이 오셔서 제주시에서 예배를 봤고 그 다음달에 금성리에서 예배를 드린다. 그 다음은 조천, 한림으로 간다.
남제주지역은 20년 지나서 그때는 교회가 독립해서 목사님 모실 형편이 안됐다.
해방될 때 제주도 전체에 교회가 26곳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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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까지 북제주군과 남제주군 등지에 예배당이 세워지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자랑스런 선교의 역사가 이러져 왔다.
하지만 선교의 열매를 거두기까지는 이기풍 선교사와 초기 전도인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목사를 따르며 선교에 매진했던 초기 전도인들중에는 제주도 주민이며 최초의 장로였던 김재원 장로와 그와 함께 최초의 장로가 된 홍순흥 장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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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전도인을 중심으로 이뤄진 획기적인 시도는 교육분야에서 일어났다.
제주도 사립학교인 영흥 학교를 세우게 된 것이다.
성내교회 부설로 세워진 영흥학교 최초 교장으로 홍순흥 장로가 임명되어 활동했고 당시 제주도에 유배와 있던 남강 이승훈 선생등 지식인들의 교류장소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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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내교회는 1942년 멀리서 오는 교인을 위하고 더 많은 교인을 전도하기 위해 서부와 동부로 분리되어 두 개의 교회로 운영된다.
초가집 두채를 구입해서 안채는 사택으로 바깥채는 예배당으로, 그때 최초로 모인 교회가 10여명, 성내교회가 태동된다.
성내교회에서 분리된 서부와 동부교회는 교인들이 야간과 주간으로 나누며 장소를 옮겨가며 예배를 드렸다.
주간은 동부교회, 야간예배는 서부교회에서 보다가 교인수의 증가로 인해 1949년 5월 1일 동서부 양 교회로 나눈다.
1949년 동부와 서부교회는 마침내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된다. 하지만 두교회 분립은 교회 증가로 인해 발전적으로 나눠졌다는 점에서 제주초기 선교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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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난다.
제주도의 대표적인 기독교인이었던 조봉호와 독립희생회라는 중요한 사건으로 연결된다.
독립희생회 자금을 모으고 전단지를 배포하다 체포된 조봉호는 대구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1920년 4월 38세의 일기로 옥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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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일제 탄압이 절정에 이르렀다 바로 신사참배 문제 때문이었다.
통계에 따르면 해방전까지 신사참배 문제로 순교한 성직자가 50여명에 이르며 끝까지 거부하던 주기철 목사가 순교하고 이기풍 목사 또한 옥고를 치르다 순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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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4월 3일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한 제주주민의 반대에 미군정과 토벌대가 투입됐고 이것으로 곳곳에서 유혈충돌이 일어났다.
그 와중에 교회들도 습격을 받았고,대정교회 이도종 목사가 끝내 순교하게 된다.
이도종 목사는 평양 신학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제주도 최초 목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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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당시 많은 서북지방 사람들이 배를 타고 서해안을 따라서 제주도에 피난왔고 훌륭한 교회 지도자와 많은 성도들이 제주도에 생활하게 된다.
그들을 통해서 제주의 교회들이 활성화 되어지고 부흥되는 사건들이 일어난다.
전쟁이 끝난후 많은 피난민이 뭍으로 돌아갔지만 그때 남은 이들을 중심으로 교회 역사는 계속됐다.
한국전쟁이 제주도 선교에 있어서는 밑거름이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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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전국적으로 장로교회 분열이 일어나고 기장과 예장으로 나뉘게 된다.
이런 교단의 분열은 제주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교단 분열에 따라 서부교회라는 이름에서 기장은 성내교회로 예장은 성안교회로 이름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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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끝난 후 교단 분열외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45년전까지 26개 였던 교회가 전쟁이후 1960년까지 74개로 늘었다. 전쟁이 끝나면서 급격하게 제주도에 교회가 늘어난 이유는 피난민과 연관이 깊다.
제주도에 피난민이 와서 세운 교회중 제주영락교회는 제주주민과 외지인이 조화를 잘 이룬 대표적인 교회로 꼽힌다.
섬사람 특유의 배타성이 있었지만 신앙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로 헌신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전쟁이후 제주도에 생긴 또 하나의 변화는 다양한 교단이 들어와 정착한 것이다.
감리교, 성결교,침례교,순복음교회 그리고 최근에는 성공회까지 다양한 교단이 정착하고 지역단위로 서로 교류하며 활발한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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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의 다른 지역에 비해 복음화율이 10퍼센트를 넘지 못하는 저조한 기록을 갖고 있지만 제주지역의 목회자와 신앙인들은 협력하여 기도하며 새로운 제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
교세는 약하나 교인들이 협력하여 연합기관 활동을 활발히 활동해 왔고 방송이나 신문을 통해 일반인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일을 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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